⓵ 예산군 가지리 저고리가
모처럼 짧은 가을방학이 생겼다. 호랑과 ‘강원도에 가보자, 좋아하는 책방에 가자, 바다가 보이는 욕조가 있는 숙소에 가자’며 내내 설레발을 쳤는데 휴가를 3일 앞두고 숙소도 정하지 못했다. “설악산엔 단풍이 다 졌다더라”, “이 숙소는 너무 비싸네” 하며 강원도에 가지 않을 이유를 찾고 있었다. 강원도는… 너무 멀었다.
“욕조와 책이 중요한 거라면, 저고리가에 갈까?”
저고리가는 디디가 사는 예산 집의 별명이다. ‘녹색이’, ‘노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색동 고양이가 사는 집이라 ‘색동저고리가’란 이름을 지었다. 오래된 한옥을 고친 시골 주택이다. 3년 전, 디디가 살던 아파트가 재개발되어 이사를 가야 했다. 천안에서 살 곳을 구하다 우연히 이 집을 알게 되어 이사를 왔다. 한옥의 특색에 디디의 미적 감각이 더해져 저고리가는 아늑하고 멋진 공간이 되었다.
긴 툇마루에 잔디밭이 있는 집.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가 사는 집. 무엇보다 따뜻한 화목난로가 있는 저고리가라면 가을방학을 충분히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새로 욕실을 단장했다. 욕실 전문가인 호랑이 기존의 벽과 바닥을 드러내고 공사를 한 것이다. 커다란 욕조 위 투명한 창문으로 대나무가 보이는 단아한 욕실이 완성됐다. 며칠씩 고민하며 찾던 숙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근사한 욕실이었다. 우리는 그 욕실을 누리러 가기로 했다.
게다가 저고리가라면 집에서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예산으로 갔다. 저고리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늘 마당에 나와 볕을 쬐는 고양이들이다. 도착하자마자 마루에 짐을 내려놓고 고무장갑을 꼈다. 욕조도 좋지만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집 마당에 우수수 떨어진 은행 알은 매년 가을의 숙원사업이었다. ‘내년엔 저걸 꼭 주워야지’, 말만 하다 세 해가 지났다.
쪼그려 앉아 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줍기 시작했다. 안주로 먹을 만큼만 줍자고 시작한 일이 ‘조금 더 주워서 동지들 나눠줄까, 옆집 할머니도 줄까, 가까이 사는 엄마도 주고, 엄마 집 밑에 사는 이모도 주자’ 하다가 그만 커다란 들통 하나 가득 주웠다. 모처럼의 휴가인데 한나절은 은행을 줍고, 한나절은 은행을 까고 말리는데 썼다.
금세 저녁이 됐다. 시골 해는 더 일찍 떨어지는 것 같다. 그날 저녁엔 매주 화, 목요일마다 가는 ‘몸살림’ 운동에 따라갔다. 디디는 운동과는 평생 거리가 먼 사람처럼 굴다가 시골로 이사 가고 3년 만에 주변 이웃들의 꾐에 넘어가 마을 주민센터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몸살림’은 요가와 같은 각종 스트레칭 동작과 체조, 근육운동 등을 종합해 만든 운동 프로그램이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밭을 매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몸이 한 자세로 굳어져버리는 노인들이 조금 덜 아픈 몸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운동이다. 강의를 진행하는 분도 농사를 짓는 분, 참여하시는 분들도 크고 작게 농사를 짓는다.
그래서인지 “내일은 갑자기 -2도가 된대유. 사과도 아직 못 땄는디” 부터 시작해서, “고라니가 어찌나 우습게 담을 넘는지, 멧돼지가 고구마순을 얼마나 뜯어 쳐 먹는지” 하는 각종 이야기들이 동작 사이마다 배치된다. 나는 얘기를 엿들으며 굽은 등을 펴느라 두 시간을 뻘뻘거렸다. 간단한 스트레칭인 줄 알았는데 스쿼트를 150번, 런지 100번을 했다. 디디는 몇 달을 해봤다고 그걸 거뜬히 해낸다.
디디는 예산으로 이사 가면서 일을 줄였다. 전보다 줄인 수준이겠지만, 아무튼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많으니 온갖 것들을 배우러 다닌다. 집에서 5km 정도 떨어진 신양면 주민센터에서 수요일은 서양매듭(마크라메), 목요일은 라탄공예와 요리교실, 생태동아리에서 천연 세제를 만들고 화, 목요일마다 몸살림을 간다. 이 강의들이 끝나면, 서각을 배울지 수영을 배울지 고민 중이란다. 일이 없는 날, 낮에는 노동, 색동, 희동이와 시간을 보내고 함께 동네 산책을 한다. 겨울이면 매일 철새를 보러 간다.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고 친구의 카페에서 종종 아르바이트를 한다.
디디의 집에 놀러 가면 나도 디디처럼 지내게 된다. 고양이처럼 느긋하고 나른하게. 멀리 나가지도 않고, 바삐 뭘 하지도 않는다. 디디의 집으로 가는 이유이다. 정규 프로그램이라고는 늦은 밤까지 불 앞에서 수다를 떨고 별 산책을 가는 것이다. 디디는 대체로 늦게 일어나 아침에 일어나 욕조를 사용했다. 몸살림 운동으로 찌뿌둥한 몸을 욕조에 반쯤 담그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만화책을 읽었다. 여행에서 누리고 싶은 건 이런 순간이었지. 비싼 숙소를 예약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디디의 시골집이 있어, 저고리가가 있어 다행이다.
디디의 집은 아무것도 안 하기에 최적의 장소지만 그래도 방학이니, 집을 나서기로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바다는 가야겠지?”
“태안 어때?”
“태안은 늘 좋지.”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가을 느낌이 났으면 좋겠는데….”
“억새…? 단풍…? 갈대…?”
“갈대? 그럼 신성리에 가야겠다. 서천 가는 김에 바다도 보고….”
서천에 가기로 했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춰 느지막이 서천으로 출발했다. 서천엔 내가 아주 잠시 디디처럼 살았던 집이 있다. 느긋하고 고독했던 파란 지붕집이다.
박소산
천안에서 디자인공으로 일한다. 맥주를 좋아하고 일기 쓰는 걸 좋아한다. 특히 인스타그램으로 장문의 글을 남기는 걸 즐긴다. 친구들과 재미난 일을 벌이면서 지역에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시리즈 소개
천안, 서천, 예산 등 충남의 다양한 지역에서 살며, 머무르며, 관찰하며 지내왔던 집과 공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잘 알려진 특별한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공간은 기록될만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을 관찰하고 엮으면서 지역과 장소에 대한 고민을 녹여냈다.
⓵ 예산군 가지리 저고리가
모처럼 짧은 가을방학이 생겼다. 호랑과 ‘강원도에 가보자, 좋아하는 책방에 가자, 바다가 보이는 욕조가 있는 숙소에 가자’며 내내 설레발을 쳤는데 휴가를 3일 앞두고 숙소도 정하지 못했다. “설악산엔 단풍이 다 졌다더라”, “이 숙소는 너무 비싸네” 하며 강원도에 가지 않을 이유를 찾고 있었다. 강원도는… 너무 멀었다.
“욕조와 책이 중요한 거라면, 저고리가에 갈까?”
저고리가는 디디가 사는 예산 집의 별명이다. ‘녹색이’, ‘노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색동 고양이가 사는 집이라 ‘색동저고리가’란 이름을 지었다. 오래된 한옥을 고친 시골 주택이다. 3년 전, 디디가 살던 아파트가 재개발되어 이사를 가야 했다. 천안에서 살 곳을 구하다 우연히 이 집을 알게 되어 이사를 왔다. 한옥의 특색에 디디의 미적 감각이 더해져 저고리가는 아늑하고 멋진 공간이 되었다.
긴 툇마루에 잔디밭이 있는 집.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가 사는 집. 무엇보다 따뜻한 화목난로가 있는 저고리가라면 가을방학을 충분히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새로 욕실을 단장했다. 욕실 전문가인 호랑이 기존의 벽과 바닥을 드러내고 공사를 한 것이다. 커다란 욕조 위 투명한 창문으로 대나무가 보이는 단아한 욕실이 완성됐다. 며칠씩 고민하며 찾던 숙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근사한 욕실이었다. 우리는 그 욕실을 누리러 가기로 했다.
게다가 저고리가라면 집에서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예산으로 갔다. 저고리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늘 마당에 나와 볕을 쬐는 고양이들이다. 도착하자마자 마루에 짐을 내려놓고 고무장갑을 꼈다. 욕조도 좋지만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집 마당에 우수수 떨어진 은행 알은 매년 가을의 숙원사업이었다. ‘내년엔 저걸 꼭 주워야지’, 말만 하다 세 해가 지났다.
쪼그려 앉아 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줍기 시작했다. 안주로 먹을 만큼만 줍자고 시작한 일이 ‘조금 더 주워서 동지들 나눠줄까, 옆집 할머니도 줄까, 가까이 사는 엄마도 주고, 엄마 집 밑에 사는 이모도 주자’ 하다가 그만 커다란 들통 하나 가득 주웠다. 모처럼의 휴가인데 한나절은 은행을 줍고, 한나절은 은행을 까고 말리는데 썼다.
금세 저녁이 됐다. 시골 해는 더 일찍 떨어지는 것 같다. 그날 저녁엔 매주 화, 목요일마다 가는 ‘몸살림’ 운동에 따라갔다. 디디는 운동과는 평생 거리가 먼 사람처럼 굴다가 시골로 이사 가고 3년 만에 주변 이웃들의 꾐에 넘어가 마을 주민센터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몸살림’은 요가와 같은 각종 스트레칭 동작과 체조, 근육운동 등을 종합해 만든 운동 프로그램이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밭을 매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몸이 한 자세로 굳어져버리는 노인들이 조금 덜 아픈 몸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운동이다. 강의를 진행하는 분도 농사를 짓는 분, 참여하시는 분들도 크고 작게 농사를 짓는다.
그래서인지 “내일은 갑자기 -2도가 된대유. 사과도 아직 못 땄는디” 부터 시작해서, “고라니가 어찌나 우습게 담을 넘는지, 멧돼지가 고구마순을 얼마나 뜯어 쳐 먹는지” 하는 각종 이야기들이 동작 사이마다 배치된다. 나는 얘기를 엿들으며 굽은 등을 펴느라 두 시간을 뻘뻘거렸다. 간단한 스트레칭인 줄 알았는데 스쿼트를 150번, 런지 100번을 했다. 디디는 몇 달을 해봤다고 그걸 거뜬히 해낸다.
디디는 예산으로 이사 가면서 일을 줄였다. 전보다 줄인 수준이겠지만, 아무튼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많으니 온갖 것들을 배우러 다닌다. 집에서 5km 정도 떨어진 신양면 주민센터에서 수요일은 서양매듭(마크라메), 목요일은 라탄공예와 요리교실, 생태동아리에서 천연 세제를 만들고 화, 목요일마다 몸살림을 간다. 이 강의들이 끝나면, 서각을 배울지 수영을 배울지 고민 중이란다. 일이 없는 날, 낮에는 노동, 색동, 희동이와 시간을 보내고 함께 동네 산책을 한다. 겨울이면 매일 철새를 보러 간다.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고 친구의 카페에서 종종 아르바이트를 한다.
디디의 집에 놀러 가면 나도 디디처럼 지내게 된다. 고양이처럼 느긋하고 나른하게. 멀리 나가지도 않고, 바삐 뭘 하지도 않는다. 디디의 집으로 가는 이유이다. 정규 프로그램이라고는 늦은 밤까지 불 앞에서 수다를 떨고 별 산책을 가는 것이다. 디디는 대체로 늦게 일어나 아침에 일어나 욕조를 사용했다. 몸살림 운동으로 찌뿌둥한 몸을 욕조에 반쯤 담그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만화책을 읽었다. 여행에서 누리고 싶은 건 이런 순간이었지. 비싼 숙소를 예약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디디의 시골집이 있어, 저고리가가 있어 다행이다.
디디의 집은 아무것도 안 하기에 최적의 장소지만 그래도 방학이니, 집을 나서기로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바다는 가야겠지?”
“태안 어때?”
“태안은 늘 좋지.”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가을 느낌이 났으면 좋겠는데….”
“억새…? 단풍…? 갈대…?”
“갈대? 그럼 신성리에 가야겠다. 서천 가는 김에 바다도 보고….”
서천에 가기로 했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춰 느지막이 서천으로 출발했다. 서천엔 내가 아주 잠시 디디처럼 살았던 집이 있다. 느긋하고 고독했던 파란 지붕집이다.
박소산
천안에서 디자인공으로 일한다. 맥주를 좋아하고 일기 쓰는 걸 좋아한다. 특히 인스타그램으로 장문의 글을 남기는 걸 즐긴다. 친구들과 재미난 일을 벌이면서 지역에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시리즈 소개
천안, 서천, 예산 등 충남의 다양한 지역에서 살며, 머무르며, 관찰하며 지내왔던 집과 공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잘 알려진 특별한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공간은 기록될만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을 관찰하고 엮으면서 지역과 장소에 대한 고민을 녹여냈다.